질병관리청 제1회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 출품작

희귀난치병 환자들은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까지 평균 5년 동안 병원을 8번 정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진단에 성공하더라도 제때 정확한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질병관리청은 희귀질환에 대한 대국민 인식도를 제고하고 희귀질환자들의 정서적 지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제1회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번 공모전에는 총 25편의 수기가 접수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는 희귀질환자들이 질환을 극복해 나가는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희귀질환 극복수기 공모전에 도전한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유전질환 중 하나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몸이 허약하고 통증에 자주 시달렸다. 특히 다리가 자주 아프고 자다가 탈구가 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통증에 대한 스틸 컷들은 짧은 영상으로 편집되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의 시작은 내 나이 4살부터 시작이 된다.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극심한 통증이었다. 사람이 통증이 너무 심하면 말을 할 기운조차 사라진다. 통증을 온전히 겪어내고 조금 잠잠해진 순간에서야 엄마를 부른다. 

“엄마. 아파서 몸이 안 움직여.” 

엄마는 나를 들어서 앉힌 후에 익숙하게 내 몸을 살핀다. 어깨가 빠졌다. 새벽에 엄마는 내 팔을 능숙하게 끼우고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묶어서 다시 뉘어 주신다. 연년생의 동생과 다르게 나는 유독 어릴 때부터 신경이 많이 쓰이는 아이였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내 몸의 통증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22살의 8월 말 경 나는 통증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 내 무의식은 깊은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희미하게 남은 뇌파 에너지가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그냥 이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뇌를 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무의식의 끈을 강하게 붙잡으려고 했다. 수십 분이 지나서야 깼다. 

가족들은 나의 단말마 같은 비명소리를 듣고 이미 내 방에 와서 내 의식을 깨우기 위한 자극을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소리도 자극도 느끼지 못했다. 

아빠는 당시에 놀라셔서 몇 시간 뒤에 시작하는 외래 진료에 빨리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날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많은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심한 통증을 설명할 수 있는 진단명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류마티스 질환에서 어떤 진단이 나오지 않는 통증환자에게 붙는 ‘섬유근육통’ 환자로 살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 통증전문의와 류마티스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면서 내 증상을 조절해 나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병명들이 점점 늘어갔다. 나는 순환기적 문제와 내분비적 문제까지 새롭게 생기면서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됐다. 

나는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논문과 자료를 찾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섬유근육통’으로 흔히 오해하기 쉬운 질병의 리스트를 감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이라고 하는 선천관절 변형의 질환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과유연한 관절을 가지고 있었고, 나뿐만 아니라 내 남동생, 외가 쪽 사촌언니, 사촌동생 들이 이러한 관절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로는 엄마와 외삼촌이 이러한 관절 과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엄마와 외삼촌의 이러한 관절 과유연성을 확인할 수 없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분 다 30대에 이른 소화기 암이 많이 진행되어 40대에 이미 사망을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러한 집안 내에서 발생하는 설명할 수 없는 사망에 대해서도 더 크게 생각을 하면서 접근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정도의 근거와 모든 것들이 이해되었을 때, 류마티스 내과 주치의 교수님에게 이 질환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 희귀해서 가능성이 낮아요”라는 대답만 들었다. 

나는 정말 오기가 생겼다. 돌아가신 분을 살려 낼 수도 없고, 내 동생은 유학 중이라 한국에 끌어다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나는 더 깊게 그리고 새로운 자료들은 모두 내 수중에 놓고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유전학 논문들을 같이 이해해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친구가 아닌 의사로서 내가 이 질환을 진단받기에 부적절한 것인지 물었다. “나도 덕분에 새로운 질병의 유전기전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너가 이 질병인지 아닌지 검사는 한 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남편의 무심결에 던진 “여보, 병원을 바꿔보면 어때요?”라는 말에 아주 즉흥적으로 ○○대학교병원 희귀질환센터에 글을 남겼다. 

답변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틀 후 나는 ○○대학교병원 희귀질환센터 담당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환자분 교수님께서 이 정도면 충분한 임상적 조건을 충족하신다고 빨리 진료를 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우선 제가 기록을 위해서 차트를 생성하고 예약을 잡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초진기간까지 너무 급하면 내가 놓치는 것들이 있을까 싶어서 한 달의 시간을 두고 기존의 병원에서의 지난 17년간의 의무기록 전부와 최근의 영상자료들을 모두 챙겼다. 그 양이 상당히 많았지만 서너 차례 분류를 하고 중복된 것들은 제거하고 외래기록, 입원기록, 수술기록, 검사지 등으로 분류를 하고 나니 그래도 300장 정도의 양의 기록이 나왔다. 이 기록을 교수님이 다 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중요 이벤트 별로 A4 용지 2장 분량으로 요약을 하고 내 진료기록의 전부를 숙지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대학교병원 초진 예약에 동행을 했다. 심층진료 대상으로 진료를 봤는데 교수님께서 30분 정도의 시간에 걸쳐서 나의 어린 시절부터의 병력부터 최근까지 상태를 확인하시고, 외가 유전력의 가계도를 작성해가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확인을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덧붙여서 보충 설명을 해주시기도 하면서 진료가 진행되었다.

교수님께서는 임상적으로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이 맞고, 유전자 검사, 호르몬 검사, 여러 영상 검사, 심전도, 자율신경계 검사 등을 오더해 주시고 나는 순차적으로 수 주에 거쳐 이 검사들을 하나씩 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COL5A1 유전자에 변이가 있었고, 가족 검사를 통해 내 남동생과도 동일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어 어머니로부터 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7년간 나를 본 주치의가 희귀하다고 말했던 그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나는 선천적 유전질환을 진단받는데 37년 7개월이 걸렸다.

희귀질환을 진단 받는 것은 심정적으로 오묘한 기분이 든다. 우선은 의학적으로 불치병을 진단 받았다는 부분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단 방랑 속에서 오진을 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는 ‘허탈감’이다. 

나머지 하나는 의외의 감정인데 미지의 상황에서 방랑자 같은 환자 생활을 하다 보니 ‘후련함’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나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듣는 날 남편과 동행을 했다. “여보, 나는 후련해요. 내가 의심한 것들이 실제로 맞았다는 점이 허탈하면서 후련해요. 내가 유전질환을 갖게 됐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해서 이러나저러나 아픈 것은 똑같지만 이제는 왜 아픈지 이유라도 알잖아요.” “여보,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니 고생 정말 많았어요. 앞으로 다 잘 될 거에요.” 우리는 진단을 기점으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 질환을 헤쳐 나가기로 다짐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럴 때 일수록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헤쳐 갈 것인가? 답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치료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심장성 실신을 수차례 반복을 했다. 두 번은 응급상황까지 생겨서 119 앰뷸런스에 실려서 한 번은 내가 거주하는 광역시 권역응급센터로 이송되었다. 내 병을 의사들이 알지 못해 나는 포터블 엑스레이 대신 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응급실 교수가 나를 세워서 엑스레이를 찍으라는 무모한 의료행위를 경험했다. 그 날의 경험은 희귀질환자는 서울 이외에 거주한다는 자체가 리스크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많은 충격을 받으셔서 ○○대학교병원 뒤에 내가 편하게 머무르면서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평수가 조금 큰 오피스텔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 오피스텔에 첫 입주를 하고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 온지 한 시간 만에 나는 또 욕실에서 그대로 쓰러져서 심각한 외상과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언어감각이 마비되는 증상을 겪었다. 

119를 부르고 2분 만에 이송되어 나의 진료카드를 통해 병력 조회를 해보더니 바로 심장중증구역으로 배정이 되고 응급실 주치의 선생님은 심전도, 응급심초음파를 찍어서 내 심장과 대동맥에 혈액이 새어나오는지 확인을 했다. “환자분 초음파에서 너무 다행스럽게 혈관에서 피가 새어나오지는 않아요.” 라고 안심시켜주면서 마스크를 벗겨 얼굴의 외상 부위에 골절이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을 다 해보았다. 

통증은 있었지만 골절은 없었고 치아파손이나 구강 내 손상도 없었다. 얼굴의 타박상과 머리가 약간 찢어진 것이 확인된 것이었다. 그리고 뇌 손상과 심장 및 대동맥 손상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사분란하게 2장 CT를 응급으로 찍었다. 나는 ‘낙상고위험군’이라서 침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누운 채로 포터블 엑스레이를 찍고 누운 채로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CT 장비로 그대로 이송되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는 것도 다 도와주셨다. 나의 외가에는 내가 모르는 이모가 한 분 계신데 이모는 고3 때 학교에서 넘어지는 외상을 입고 다음 날 과다출혈로 사망을 했다. 아마 이모도 엘러스단로스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유전력과 가족력만으로도 가벼운 외상으로 내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대학교병원 응급실 의료진은 차트에 상세히 기록된 것들을 보고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력들이 총동원 되어 나에게 혹시나 모를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지 빠르게 확인을 했다. 

일반인들에게 가벼운 넘어짐이 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기적으로 6명의 교수님에게 다양한 유전질환의 합병증을 관리 받고 있는데, 모든 교수님들이 내 심장 문제로 한동안 상당히 걱정을 하셨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여러 검사를 통해 적절한 약물을 찾아서 내 심장문제가 큰 문제없이 조절되고 있다. 나는 생소한 질병을 진단받은 환자를 리스크를 떠안고 책임지고 맡아주신 교수님들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가 많다. 유전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체의 여러 측면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가능성도 많고, 때로는 어떤 약물에 대해 반응이 없거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문제들이 도사리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급적이면 나의 여러 증상들을 정리하고 협진 상황에서 공유되어야 할 내용들을 정리해서 외래 진료를 철저하게 준비를 해가는 편이다. 교수님들은 나는 이런 부분을 통해서 좋은 라포를 형성하고 진료시간에 필요한 것들을 논의하고 치료 계획을 잘 따르는 환자로 신뢰를 하신다. 실제로 작년의 위기상황을 겪고 1년 동안 나는 적극적인 의료진의 개입으로 인해 삶의 질이 높아지기도 했고, 여러 증상들이 그런대로 잘 조절이 되고 있다. 통증치료의 측면에서도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를 통해서 시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관리를 해나가고 있다. 

희귀질환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성가신 것들이 많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을 해보면 제대로 진단을 받은 이후로 나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여러 치료방법들을 고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그로 인해 내 마음가짐 또한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관리의 측면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는 경우가 많다. 나는 워낙 성격이 긍정적이고 낙담하지 않는 타고난 기질 덕분인지 여러 증상들이 실제로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그런 부분을 지나치게 걱정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께서도 타고난 기질적인 부분이 질병을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를 하신 적이 있다. 물론 나도 두렵고 무서울 때가 왜 없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내 감정들을 다 표출하고 나면 그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심연의 두려움은 내가 우리 엄마나 외삼촌처럼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질병을 진단받고 꾸준한 추적관찰을 통해서 의학적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나의 기대 여명에도 분명히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은 사람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재활을 꾸준히 하고, 병원치료에도 적극적인 이유는 단 하나다. 나를 통해서 이 질병의 정도가 심한 환자 군에서도 의학적 도움을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이고 관리를 통해서 치명적인 위험도를 낮추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은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매일을 최선을 다하고 컨디션이 오락가락 하더라도 최소한의 일상생황을 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한 관절의 기능적 불편함으로 피로도가 높고 심한 통증과 매일 싸워 나가고 있지만 그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내 상태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내 생활을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주어진 시간을 가치 있게 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속도대로 나에게 주어진 희귀질환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매일매일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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